버려지다
옥탑방의 창문으로 벚꽃잎 하나가 날아들어 토끼인형 위로 살포시 내려 앉았다.
봄이 이 구나.
그 순간, 나는 과거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포근한 봄날이었다.
나는 오래도록 그녀와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날, 나는 버려졌고 나의 세상은 무너졌다.
수많은 사람으로 붐비던 거리에서 나는 마치 잊힌 존재처럼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았다.
모든 이의 발걸음은 빠르게 어디론가 향했고, 나를 보아주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날, 소영이 나를 주웠다.
소영의 가방 속에서 어디로 향하는지 모른 채 가방 위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방 안으로 벚꽃잎 하나가 내려와 내 가슴 위로 사뿐히 떨어졌다.
나는 소영의 가방 한편에서 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만남
나는 기억한다.
처음 소영과 만난 순간을.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너도 나처럼 버림받았구나."
그리고 한참을 나를 안고서 울었다.
그날은 벚꽃이 많이 날리던 봄날이었다.
버려진 나를 주운 순간, 그녀는 나를 씻겨주고 새롭게 손질해 주었다.
소영의 손길은 조심스럽고 섬세했다.
며칠 동안 소영은 나를 볼 때마다 안고서 울었다.
나는 그녀가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서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내 몸은 한동안 짭짤했다.
마치 지구의 바다에 빠졌다 나온 것 같았다.
소영은 나에게 버니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순간, 나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하루
소영의 하루는 따스한 햇살이 비치면서 시작된다.
마치 세상이 빛과 함께 시작된 순간처럼. 소영은 일어나서 창문을 열고 밖의 상쾌한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신다.
커피를 올려놓고 토스트를 굽는다.
나는 소영이 내리는 커피와 토스트의 고소한 향을 좋아한다.
커피와 토스트가 준비되면 소영은 창가에 앉아 다이어리를 보면서 아침을 먹는다.
하루를 시작할 준비가 끝나면 소영은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집을 나가 소영이 내려갈 때까지 들리는 그녀의 신발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녀의 발걸음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소영의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본다.
소영이 나간 방은 커다란 퍼즐이 사라진 것 마냥 공허하다.
그녀의 방 책상 앞에는 온통 그림들이 가득하고
작은 책장이 있는데 책이 많아서 책 위에도, 침대 옆에도 책들이 쌓여있다.
그렇다고 그녀의 방이 정신없는 것은 아니다.
많은 물건이 있지만, 마치 그곳에 그 물건들이 있어야 하는 장소인 듯 거부감이 없다.
내가 창가에 앉아 있는 이유가 있는 듯이 말이다.
마치 자기 자리가 정해져 있는 퍼즐 조각처럼.
비가 내리고... 그리고 맑음
오후가 되어서 먹구름이 몰려왔고 비가 엄청나게 내렸다.
불안한 마음 틀리지 않았다.
그날 소영은 저녁 늦게 들어왔다.
비를 많이 맞아서 흠뻑 젖어있었고 많이 취해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내가 처음 만났던 날처럼 그녀는 많이 울었고, 한참을 울고 나서야 지쳤는지 잠이 들었다.
그날 밤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아직 그녀의 아픔이 남아있구나.
그리고 나에게 화가 났다.
소영은 나에게 새로운 삶을 주었지만, 정작 나는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
비는 새벽 늦게까지 내리다가 그쳤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새소리가 들리고 창문으로 따스한 햇살이 들어와 소영의 얼굴에 비추고 그녀는 깨어났다.
숙취에 힘들어하지만 여느 날과 다름없이 창문을 열고 커피와 토스트를 준비하며 하루를 맞이한다.
마치 어젯밤의 슬픔은 기억하지 못하는 듯.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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