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창작소/이야기들

조금씩 조금씩

by 차근 차근 한걸음 2024. 7. 26.
반응형

 

늦가을의 찬바람이 겨울의 문턱을 두드리는 시기

 

집 안은 고요하다. 
침묵을 깬 것은 핸드폰의 8시 알람 소리. 

민감형은 짜증을 내며 일어나 책상으로 향한다. 


핸드폰을 끄고 의자에 털썩 앉아 졸린 눈으로 멍하니 벽을 바라본다.

다시 울리는 알람. 민감형은 정신을 차리며 방의 불을 켠다. 

책상 앞 벽에는 '올해는 꼭 작품을 만들자'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그는 양손으로 볼을 찰싹 때리며 결의를 다진다. 
그러나 눈앞의 흰 종이를 바라보며 그의 얼굴은 어두워진다.

시간은 흐르고, 창밖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 
익숙한 멜로디가 감성을 자극하지만, 연습 중인 건지 같은 부분에서 계속 틀리며 민감형의 인내심을 시험한다. 

며칠 동안 반복되는 엉망진창의 피아노 소리에 항의하고 싶지만, 
1층 주인집 어린아이들이 조용히 있는 것을 보며 자신이 예민해서 시끄럽게 들리는 거란 생각이 들어 항의하러 가지 못한다.

 

AI 생성이미지


이어폰을 끼고 작업하려 해도 소리의 이어폰의 음악 소리와 피아노 연습 소리의 불균형 때문에 오히려 정신이 산만해진다. 
음악을 너무 크게 트니 귀가 아프고 총체적 난국이다.

며칠이 더 지나고, 민감형은 술집에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난다. 
취직해서 잘나가는 친구들 틈에서 자신의 초라함을 느낀다. 
친구가 근황을 묻자, 민감형은 작품 준비 중이라고 얼버무리며 집 근처 피아노 연습 소리 때문에 작업이 어렵다고 투덜거린다.

집으로 돌아온 민감형은 한 손에 검은 봉지를 들고서 다시 흰 종이를 바라본다. 
좌절감에 선을 마구 그으며, 결국 종이를 찢기 시작한다. 
방 안은 종이 조각들로 어지럽혀진다. 

그때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언제나 같은 그 곡
민감형은 피아노 소리를 듣다가 울컥! 화가나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멈칫한다.

 


오늘은 평상시와는 다르다. 
민감형은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틀린 부분이 없이 연주가 매끄럽다. 

힘이 빠진 민감형은 방안에 털썩 주저앉고서는 담배를 하나 꺼내서 피우며 피아노 소리를 감상한다.

피아노 연주가 끝나고 침묵이 흐른다.
민감형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띈다.

민감형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곰곰이 되돌아보면서,

그동안 피아노 소리로 인해 작업을 방해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신이 피아노 소리 뒤에 숨어 핑계 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의 갈피 잡지 못하는 마음과 지지부진한 작업을 피아노 소리를 핑곗거리로 삼은 것뿐이었다. 
진짜 문제는 자기 자신에게 있었던 걸 알게 된다.

한참을 침묵 속에서 자신과 마주하며 생각을 정리한다.


다음 날 아침, 

민감형은 책상에 앉아 열심히 작업을 하다가 기지개를 켠다. 
창밖으로 떠오르는 해를 보며 담배를 피우고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다. 

좋은 흐름으로 계속 작업을 이어가려는 그때 다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

이런!!
새로운 곡이다.
이번에도 잘 아는 곡

그런데 또 중간중간 틀리게 연주한다.

울컥 하는데 갑자기 헛 웃음이 나온다.
잠시나마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반응형

'창작소 > 이야기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다나  (0) 2024.07.03
런!  (0) 2024.06.11
에볼루션  (0) 2024.06.09
다이(die)-어트  (0) 2024.05.27
비가 내리는 어느 날  (0) 2024.05.26